김혁일 시선 2

봄이 다하도록

꽃들이 피고 있다
뭐라고 열심히들 조잘거리며

꽃들이 지고 있다
뭐라고 기도하듯 중얼거리며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멍청히 그 곁에 서 있기만 한다

봄이 다하도록 멍청히
오로지 멍청히 서 있기만 한다


무 제

그대 언덕길 오르다
혹시 바람이 등을 밀어주면
먼 이곳 나의 응원인 줄 알았으면

늦은 봄날 서성이다
혹시 어깨에 꽃잎 하나 지면
내 숨결이 머물다 간 줄 알았으면

그러나 어느 날 그대 어깨에
참말로 내 손이 얹혀지면
그대 돌아보지 마세요

꿈이라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나는 잠깐 왔다 가는
가벼운 바람일 뿐인 것을

그러나 돌아보면 인간 세상
뭐 하나 왔다가 아니 가는 거 있던가요
청춘도 인생도 계절도 바람도…

그러나 이것만은 새겨 두세요
그대가 가는 곳에 바람이 가고
바람 머무는 곳엔 나의 숨결이 있음을


붉은 짐승

이른 아침 뒷산 언덕길에 떨어진 붉은 꽃들
사랑 화살 맞고 수림으로 숨어든
오늘은 또 어느 덩치 큰 짐승이 흘린 피일까
봄에는 주먹 대신 주먹 만한 꽃을 내두르는
봄에는 심장이 심장 같은 꽃으로 피고 지는
사랑이 아픈 상처가 되어
지금 쯤은 뒷산에 숨어 어떤 키 큰 꽃나무가 되어버렸을
오, 붉은 꽃의 짐승아


들로 나가면

들로 나가면
이삭들이 얼마나 옹골찬 인생을 살며
얼마나 인정 있는 이웃들이며
얼마나 진지하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런 것들이 다 보인다

들로 나가면
사람의 소리가 크게 들린다
바람과 나무의 대화도 또렷이 들린다
도심에서는 먹먹하던 귀가
들에서는 바람에 뚫려
작은 풀벌레의 노래조차 구성지다

들로 나가면
아주 외로운 오솔길도
끝내는 사람이 사는 마을로 이어지고
사랑이 있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간혹은 부르지도 않은 이름이
한번도 감히 소리 내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멀리서 달려오기도 한다

들로 나가면
내가 잃었던 것들
내가 숨겼던 것들
아 그것들이 모두 뛰쳐나와
아 그것들이 모두 수풀이 되어
일제히 날 향해 손을 흔든다


무 심

1

널 그리는 것 외에는 더 할 일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오늘은 땡땡이를 쳤어
들로 나왔어
언덕에 누워 하늘을 봐

그러면 무심한 구름
한 장 두 장 또 한 장...
서서히 은밀히
어떻게 너의 귀여운 보조개가 되고
어떻게 너의 쪽 진 머리가 되고
지어 두 팔 벌려 달려오고
그러다 엎어지고

2

이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임 생각 하고
토요일 일요일엔 그리움 금지

3

오늘은 출근 안 하고
산에 올라 보고
강가에 앉아 보고
둑이나 논두렁이나 오솔길을 걸어 보고
임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혼자 바람처럼 싸다니다 밤이 되어 집에 가야지

그러나 돌아오면 문전에
그리움이 먼저 와 앉아 있고

4

무심히 보아도
무심한 숲은 흔들리고
흔들리는 누구의 마음이 보이고

5

임이 그리울 때면
그저 잘 마른 맨 땅 골라 엎디어 보네
볕 쬔 땅이 따뜻한 것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이겠냐만
그 땅조차 당신이 엎디었던 땅 같아서

6

바람보다는 좀 촘촘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좀 촉촉했으면 좋겠다

간 보고 맛보는 혀가 아니고
아작아작 씹는 이빨이 아니고
그저 입술이면 좋겠다

꼭 다문 입술은 사랑이 아프다
좀 벌린 입술은 사랑이 그립다

내 마음에 닿는 사람
내 입술에도 닿았으면


아침 편지

바람이 불면 잎새들은
서로의 볼을 부벼 서로의 마음을 전한다

나무가 설레고
잎새들이 서걱이는 날은
바람이 외로움을 달래는 날이다

애인 허리 한번 꼭 안아주지 못하는 바람은
잠깐 나무를 흔들어
간절하고 허전한 마음을 달랜다

혹시 당신에게도 이 바람이 닿아
당신의 볼 당신의 목을 부비면
바람이 야위었다고
가슴 아프지 마시라


나무 곁에 서다

나무 곁에
나무의 자세로 선다

상체를 틀어
왼쪽 하늘을 바라보고
오른쪽 하늘을 바라보고
뒤쪽 하늘도 돌아보고
다시 고개 젖혀
위의 하늘을 우러른다

나무 곁에
나무의 마음으로 선다

자, 이제 다 부리고
옷을 벗고
가을 나무가 되자
나무처럼
눈 감고 온몸으로
가을 하늘을 보자
뼛속까지
쪽빛 하늘을 만끽하자


나무는 누가 그리워서 외로운 것일까

저 나무는 왜 여기 산정까지 올라와서
왜 저렇게 외발로 서서
늘 먼 한 곳만 바라보는 것일까
햇살 밝은 날에는 잠시 내려놓은 그림자에서
나는 나무의 심사를 잠깐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하늘에다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지우고 지우고 또 적는
나무의 그 사연을 몇 구절 읽을 수가 있다
수많은 나무들과 산에 같이 있어도
나무는 외로운 모양이다
그러나 누굴 사랑해서
누가 그리워서 그렇게 외로운지
그 비밀은 나도 알 수가 없다


암향(暗香)

좋은 날이다
내 마음이 평화로워
창에 가득
정원에 가득
고요한 햇살이 쌓이는 날이다

참으로 좋은 날이다
방에 앉아
가을 하늘이
내 가슴이
아스랗게 파란 날이다

죽기 좋은 날이다
살기 좋은 날이다
사랑하기 좋은 날이다
사랑 안 하기 좋은 날이다

별짓 안 하고도
참으로 좋은 날이다
오늘도 또
공짜로 좋은 날이다


가을 계곡에서

가을을 타서 그런 가 보다
냇물은 많이 야위었고
걸음이 다급하다
계곡엔 낙엽이 흩날리고
더러는 물살에 실려 삽시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가부좌하고 물속에 버티는 돌이 있다
오리라던 임이 아직 안 왔나 보다
차마 떠나지 못하나 보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 보면
망부석들이 널린 여울목은 물살이 더 세다
더 차갑다
조랑말도 발이 시려 건너기를 저어하는데
그래도 계절은
바람이 징검다리 건너가듯
잘도 건너간다
벌써 산 너머란다
오늘은 하룻밤 여기다 배낭을 푼다
가장 외로운 망부석을 찾아
곁에 모닥불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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