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26

오늘도 도시는 세수를 한다

오늘도 세수를 안한다 이 도시는
오늘도 먼지로 아침 化粧을 시작한다 이 도시는

나는 초롱초롱한 눈들이 보고 싶다
나는 쌩얼의 이쁜 아가씨가 보고 싶다
나는 냇물에 미역감고 생살이 눈부신 아낙네들이 보고 싶다

그러나 이제 이 도시는
씻을 냇물이 없나보다
비출 거울이 없나보다

이 화장끼 짙은 도시
그 촌스럽고 상스런 면상에
그래도 욕심만은 칼처럼 번득인다

오늘도 이 도시는 세수도 안 하고
아침부터 먹어 댄다
싸 댄다


어획

나는 해변에 그물을 쳐 바람을 잡고 있습니다
싱싱한 바닷고기보다 더 싱싱한 바람을 잡고 있습니다

나는 바람이 좋습니다
나는 바람에 뚫리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해변에서 그대를 바람처럼 해빛처럼 만져보고 안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당신을 가지는 것 보다 놓히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당신을 잡는 그물입니다
당신은 나를 잡는 바람입니다


해변일기

그대는 햇빛에 묻히고
나는 그대의 눈빛에 묻입니다

바람은 숲을 움직이고
그대의 눈빛은 나를 움직입니다

비둘기의 하얀 어깨 위에
햇살이 눈부십니다

그대의 까만 눈동자엔
무수한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입니다

그대는 가장 찬란한 정오입니다
그대는 가장 깊은 밤하늘입니다


들에서 부르는 노래

나는 노래와 여자와 그리고 들에서 땀 흘리는 일을 사랑했다
아무도 없는 들에서 나는 실로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실하게 자라는 풀과 곡식들 그리고 나처럼 잘 걷는 물과 구름과 바람들

아침부터 걸어 정오 쯤은 교외의 넓은 들과 만나는 일을 나는 사랑했다 
그곳엔 고요의 소리가 기다리는 여자처럼 숨쉬고 있었다
사슴의 눈망울처럼 나를 커다랗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쯤에서  멀리 도시 쪽을 돌아보는 일을 사랑했다
교외에 우뚝 서서 나무처럼 무성한 눈길로 도시를 성냥갑으로 볼 수 있었고
누구의 오또기로 볼 수도 있었다

나는 들로 나가 조금 미치는 일과 조금 외로운 일과
그리고 없는 여자를 멀리 그리워하는 일과
혼자 목이 쉬게 실컷 노래 부르는 일을 사랑했다


미련

냇물에 금방 머리 감고
아직 빗어 쪽지지 않은 여인의 머리칼
비 그은 여름 밤  

이제 여명은 창가에 비껴 서서
그 쑥향의 검은 머리칼을 어깨 뒤로 빗어 넘기며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비 그은 여름 밤을 취하고 일어나
사랑이 있는 행각승 하나가 남의 여자 규방에 앉아
떠날 길을 잊고 있다


소게(小憩)

때먼지에 찌든 옷가지들 어쩌다 빨아
냇가 두 세 그루 나무가지에 넋처럼 널어놓고

먼 길 잠시 잊고
조약돌처럼 발가벗고

볕을 쬔다

하얀 것은 하얗게 젖가슴 내놓고
빨간 것은 빨갛게 입술 내밀고
까만 것은 까맣게 머리칼 날리며

빨래들도 볕을 쬔다 
오랜만의 제모습들이다

산새가 발치까지 와서 유창하게 지껄인다
그놈이 경상도 사투리에 古漢語까지 섞어 도연명에 대해 지껄이고 있음을
나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노숙(宿) 

눈물 많은 나의 들아
이젠 눈물이라 하지 말자
이슬이라 하자

나는 이슬로 목걸이 한 너의 풀 한 포기 보다
더 행복하지도 더 슬프지도 않다

나는 지금 이 세상 가장 긴 밤을 풀 한 포기로 노숙하며
모든 이슬을 별이라 명명하고 있다
모든 아픔을 꽃이라 부르고 있다


버드나무

복숭아 밭 저쪽 언덕
아무 것도 맺지 않는
버드나무

황금보다 눈부신
가벼움을 가벼움을
無師自通하는 무희
바람과는 천생 배필

쉰 일흔 늙을지라도
머리칼이 소녀같이 치렁치렁한
寒士의 이쁜 딸
시인과는 천생 배필

비가(悲歌)

오늘도 한사코
아무 일 없다

벼짚 가마니 같은 하루
감자알 같은 일상
헛간

온종일 씹는 종자
새김질하는 종자

뒷간에 부릴 것 외는 다시 신기할 것 없는
아 아  오늘도 한사코 아무 일 없다


겨울 철새

마른 겨울 눈은 오다 말고

같이 누울 침대도 없건만
어젯밤도 꿈속으로 찾아드는
초생달 하이힐

내가 사는 도시는 내가 사는 도시에 없어도
이른 봄을 한 아름 꺽어다 하얗게 꽂으려
빈 술병 파란 하늘처럼 창턱에 세워두고

새별 눈들 죄다 실려간
텅 빈 겨울 거리 위에 앉아
강남 갔을 철새 한 마리는
강남 못간 철새 한 마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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