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22

외길

가는 이 아무도 없어도
외길은
혼자 간다
물처럼
그렇게 쉽게 살 수도 있으련만
외길은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했다
실날 같은 외길은
의외로 끈질기다
높은 산을 만나도
담쟁이넝굴처럼 인내를 가지고 오른다
남보기 안쓰럽게
참으로 힘겹게
거슬러 흐르는 외길은
때로는 의외로
잘도 흘러내린다
유창하다
가끔은 바람처럼 미치기도 한다
기실 외길은 멀리서 오히려 잘 읽혀진다
먼 옛날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서
혹은 조금 높은 산에서 보는 외길은
일필휘지로 거침이 없다
가는 이 없어도
외길은
이젠 노래부르며 간다
휘파람 불며 간다
혼자
잘도 간다


염색

그해 여름
나의 흰 셔츠는
오유마을에 가서
별빛에 젖고
장작불에 마르고
그리고 타는 노을과
어린 시골 학교 여선생의 홍조에 물들고
그해 여름
나의 흰 셔츠는
오유마을을 떠나
기차로 줄창
하염없이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돌아와서
지우지도 빨지도 다리지도 못하는
나의 흰 셔츠는
지금도 그 여름  그 창가에 걸려 있는
나의 흰 셔츠는

 

요즘 나는 가만히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요즘 나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가만히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다
풀 한 포기 뽑지 않으면서
하루 세 끼 꼬박꼬박 하얀 이밥 축내고
실 한 오리 잣지 않으면서
일년 사시 이옷 저옷 가려서 입고
벽돌 한 장 안 나르고도
창 밝은 기와집에서 살고
… ...
생각해 보면
평생 별로 하는 짓도 없이
옛날엔 그저 책장이나 뒤적이고
요즘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이나 두드리고
그저 그러고 살면서도
매일 먹고 입고 쓰며 사는 자기가
가다가 신기할 때도 있고
간혹은 부끄러울 때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다가 제정신이 들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산과 들과 풀과 나무와 버러지와 짐승들에게
이 세상의 물과 공기와 바람과 구름과 해와 달과 별들에게
나는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데
그들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는 것이
나는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심히 부끄럽기도 하다


백년을 쳐다볼 여자는

저쪽 호숫가
흰 여자를
이쪽 언덕 위
가슴 뚫린 정자(亭子)는
쳐다만 보는데
백년을 쳐다만 보는데
저기요 하고
나직이 부르면
부르면 화들짝
사슴이 놀라
여자는
목이 긴 여자는
정녕 아무 말 못하는데
천 마디 무언
부서지는데
수면 위에 부서지는데
아, 바람이 부는데
이쪽 호숫가
남자의 젖은 매생이
하염없이 흔들리는데

 

봄은 가고

(봄이라고 해서 모처럼 나갔더니 꽃은 어느새 피고 지고 들에는 풀들만 무성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들에
숲에
나의 옷자락에
바람이 분다
약속이나 한 듯
바람과 계절과 세월은
나만 허수아비처럼 세워 두고
저들끼리 잘도 내닫는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지나고
바람을 쫓아가지 못하는 풀들은
허리굽혀
열심히 스타트를 반복한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봄은 가고 없고
꽃은 피고 지고
들에는
바람이 분다


그해 여름의 간이역

기차는 떠나고
역은 비어 있다

산은 조을고
매미의 울음소리 자지러지다

멀리
기관차 구르는 소리 가까워지고

멀리
기관차 구르는 소리 멀어지고

작은 역은
다시 매미의 울음소리에 매몰된다

 

밤개 달을 짖다

개는
울타리에 부는 바람에
신경이 곤두선다
왕 왕
개는
동구밖을 지나는 늦은 길손이
의심스럽다
왕 왕
개는
오늘 유난히 밝은 달이
아니꼽다
왕 왕
개는
짖다 자고
자다 짖고
드디어 날이 밝는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개는
더 짖지 않는다


이른

입학 첫날의
초면의 여학생같은
이른 봄

아직은 벗은 나뭇가지에
작은 새의 앞가슴이
동그랗다

더 작은
버들개지들의 앞가슴이
올롱하다

겨울 내내 매섭던 바람이
나의 맨손에 악수를 청한다

목도리 푼 뒷덜미에
좋은 볕 한 줌
누구의 따뜻한 숨결같다


3월의 들에 내리는 눈

3월의 들
아직은 닫혀 있는 피아노
아무 소리 없는 피아노

지금 그 위로
눈이 내리고 있다
나의 차갑고 부드러운 눈길처럼 사랑처럼
내려선 村婦들의 속눈썹과 초봄의 아지들을 적시고 있다

3월의 들
이제 막 조율을 마친 피아노
초록의 소리들이 아지들마다의 가슴에 갈색으로 망울져 있다

3월의 들
하얀 손목의 피아니스트가 지금 막 산을 넘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깃털처럼 내리고 있다

소리없이
눈이 내리고 있다


해남도 아리랑

1999년 여름, 하늘 끝 바다 끝이라고 해서 천애해각(天涯海角)이라고 불리는 중국 남쪽 끝의 해남도 싼야(三亞)에서 나는 우리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조선인 2세 여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기 해남도에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군에 끌려왔던 조선인 두 명이 살고 있었어요.한 분은 저의 아버지고 한 분은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어 줄곧 해남도에 남아 사신 위안부할머니였어요. 해남도 중부의 * * 현(縣)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는 간혹 유일한 조선인 동포인 우리아버지를 여기 싼야(三亞)에까지 찾아오군하셨어요. 할머니가  오실 때마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아리랑을 불렀고 아리랑을 부르면 두분 다 울었어요..."

조선은
돌돌 말아 장롱 밑에 고이 간직한
할머니의 백면포 한 필
한 때는 구겨지고
찟기고
또 한 때는 피가 흐르고
두 동강이 났지만
반세기가 지나도록 할머니의 그 백면포 한필은
숫제 온전했다
하얗기만 했다
도라지를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하고 부르면
고국산천은
돌돌돌 족자처럼 마음 속에 감겨들었고
아리랑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고 부르면
만천 감회는
낙동강 대동강처럼 굽이쳤다
조선은
할머니가 간직하던 백면포 한 필
고운 이불 한 채 지어 따뜻이 덮지 못해도
꿈에도 껴안고 자던
할머니의 조선
하얀 백면포 한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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