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16

언덕                        

저 언덕
저 거침없는 시야

누워 조는 듯
하나 좌선하고

주저앉아 체념한 듯
하나 어디론가 결연히 떠나는

저 언덕
저 완만한 경사

젖히는 노자의 배짱 같기도 하고
숙이는 공자의 잔등 같기도 한

저 언덕
저 知天命의 너그러움

발치엔 不惑의 강물 유유하고
어깨엔 耳順의 바람 가볍고

하늘엔 從心所慾
구름이 흐르는데


이제 나에겐 사랑하는 일만 남았다 

사랑하여, 나는 가난하지 않아라
이 세상 내 눈에 보이는 것
어느 하나 내 것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정을 갖고 바라보는 것 얼마이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 또 얼마인데

나에게 차례진 것 어찌 코 앞에 보이는 밥그릇 하나 뿐이겠는가
내가 팔을 벌려 안을 수 있는 것 어찌 내 여자 내 자식 하나 뿐이겠는가

나는 세상 하나를 안고 있는데
내가 어찌 가난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아름으로 받아 안는 이 하루
이 공짜로 얻은 하루를 나는 어찌할건가

가슴엔 사랑이 가득 차
이제 더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부자여서
가슴이 부자여서

내겐 이제 나누는 일만 남았는데
사랑하는 일만 남았는데


초야별곡 

장가드는 시골 총각 夕陽 만석이
저기 서녘에 서서 점도록 얼굴만 붉히는데

꽃새댁 초승달은 뭐가 마뜩잖아
돌아 서서 내내 하얀 실눈이네

첫날밤이 좀 서먹서먹하겠지
사랑싸움은 이제 시작이겠지

인제 땅거미 서서이 내리고
사탕 먹으려 꼬마별들 하나 둘 나타나고

아 그런데 그런데 만석이 과음했는가
초저녁부터 녹초가 되어 너부러졌는데

야속하고 야속하고 또 야속하여
꽃새댁 한사코 洞房에 들어가지 않네


너럭바위에 엎디어

해가 지고 땅거미 내리고
사람들 다 내리는 산을 내가 오르고

볕이 한낮을 엎디었다 간 너럭바위에
지금은 내가 엎디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아, 아, 살면서 안아서 늘 명치끝에 맞혀오는 이 딱딱한 것들
그래도 가만히 엎디어 있으면 괜히 풍성한 젖가슴 하나 그리워 가슴이 뭉클한 것은

생각해 보면 내 잔등 참으로 널 닮아
가냘픈 여자 몸 하나 편하게 업어주지 못하고

뭐 대단한 걸 짓겠다고 늘 굳히고 다지더니
그러나 붉은 기와 한 장 올리지 못하고

아, 아, 등신은 인제 그만 엎디어라
돌에게 무슨 당치도 않은 뼈 녹이는 치정인가

아, 아, 이젠 그만 산을 내리자
인제 그만 하산해 어느 한적한 길목에 아주 낮게 묻혀

주저앉은 사람 잠깐 등이라도 기대라 하고
다리 아픈 길손 잠깐 엉덩이나 놓았다 가라 하고

혹시 책상 없는 아이들이 나와 공책이라도 펼치면
나는 간만에 일어나 앉아 자작시 한 수 읊조리고…

아, 아, 해가 지고 땅거미 내리고
이젠 주둥이 닥치고 달이 뜰 시간이구나

아, 아, 그래도 달은 어김없이 뜨고
산은 더 아무 말씀이 없으시구나


소녀향

1

그리움만 먹어 속이 쓰린 소녀
첫사랑 말을 못해 여드름이 자꾸 자꾸 돋는 소녀

2

사랑 가득 얹어
젖가슴 봉긋하고

욕심은 한 올도 안 둘러
허리가 날씬한

3

소녀야, 살벌한 세상에 뿔이 꿈나무 같은
먼 산만 바라보아 목이 긴 사슴아

4

눈이 맑아 이슬같아라
말이 고와 입이 앵두같아라
옷깃 곱게 여며 향기 그윽해라

5

오늘따라 사춘기 여학생 교복이 단정하구나
간밤 저 교복은 누구를 그리워 하며 베개 밑에 곱게 포개져 이 아침을 기다렸을까
주머니에 곱게 포갠 내 손수건 하나도 넣어주고 싶구나


누구의 그리움 사향이 되어        

1

저 여자
어깨가 외롭구나
향기마저 외롭구나

향기 중에서도 외로운 향기가 가장 아련하여
저 여자 나를 잡아들여라

2

여자의 그리움 사향이 되어
그 향기 멀리 나그네 허리에 감겨라

먼 여자 손 쥐여 줄 수 없어, 나그네
여인숙에 옆구리가 결려라

3

8년 전 니 덜미에 날리던 머리칼이 외로워
지금 바람 안은 내 걸음이 휘청이여라

4

그대 외로움이 술로 익으면
나와도 한잔 나누시려나

그대 술잔에 넣어 줄 빨간 물건
나 이미 8년을 간직하고 있는데

5

내가 안아주면 니 외로움이 줄어
내 빈 가슴은 얼마만큼 만조가 차려나

6

그대 손가락에 반지 끼워 줄 수 없어
내 심장이 그대 등에 도장 하나 찍어주나니

내 말 못하는 심장이 뒤에서 부르면
임이여, 그대 지체없이 등 돌려 날 안아주오


  

하얀 공기에 하얀 밥을 담는 것이
나는 좀 외롭다
그래서 봄이 오고 여름이 되면
채마밭에 나가
한창 자라는 완두콩이며 강냉이며 따다
섞어서 밥을 지어본다
하얀 이밥에
노란 것들이
혹은 푸른 것들이 곱게 섞여 있는 것은
나에게는 작은 위로가 된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밭에 더 열리는 것이 없으면
하다못해 좁쌀을 사다 섞는다
희게 토실토실한 알갱이들과
노랗게 조촐한 것들이 살을 섞는
오롯한 밥 한 공기는
내 영혼에게도 작은 위로가 된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시작은 백지 한 장이어서 무엇보다도 찬란하다

백지의 상공을 비행하는
연필의 분주한 스케치

쉽게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고
먹물 한 방울 허투루 떨어지지 않고

시작이라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이라는 것

백지 한 장
혹은 칠흑 한 장

그래도 오늘부터 또 시작이다
내 인생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백지의 상공을 터치하는
붓의 현란한 몸짓

이 행복한 춤을
신들린 무당처럼 獨舞 하며

시작은 온통
스릴 뿐이다


조랑말같은  남자  

저 남자
인력 삼륜차 한 대에 처자식 다 싣고
보따리 하나도 꿍져 싣고
그래도 두런두런
나무가지들처럼 이야기도 나누며
갈 곳은 있는지, 어디에
아침 밥상 차릴 셋집은 하나 있는지

저 남자
조랑말 같은 남자
조랑말 같이 길이 들어 줏대도 없어 보이는 남자
그래도 처자식 굶기지 않고
인간된 도리 하나 버리지 않고
시들지 않고
세상엔 과욕 하나 빼곤 버릴 것이 없다며
남들이 버린 것 수거해 먹고 사는

집이 없어도 침대가 없어도
드렁드렁 코 골며 자고
발 편 잠 자고
여편네 히죽히죽 잘도 웃어주는
저 남자

그늘 많은 인생살이에도 볕은 많이 쫴
얼굴이 붉은 남자
이빨이 흰 남자
부디 이 아침
햇살 많이 실어 가시라


  예쁘게 생각해  사후

죽는다는 거 뭐 별거겠는가
낮일 고달픈 머슴 곯아떨어진 밤잠
그 것 이상이겠는가

누구와의 천년의 키스
너무 황홀해
차마 눈 뜨기 싫은 꿈이어서
혜성이 지구를 두 쪽 내기 전에는 깨지 않을

죽는다는 거
그거 좀 생소하겠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
그 것 이상이겠는가
그저 억센 평안도 사투리가
좀 서걱서걱하긴 하겠지만

나는 이세상에 울며 왔다던데
나는 이세상을 늘 찌푸리고 살아왔는데
이제 떠날 때만은 다 풀고
느긋이 웃으며 가야지

내가 살아서
한 번도 천사의 날개 밑에 포근히 쪽잠 자 본 적 없는데
죽어서는 참으로
따뜻한 잠자리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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