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서 돌아와
오늘은 내 눈이 흐려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내 가슴이 닫혀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뻬뿌젱이도
할미꽃도
풀벌레도
아무도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들에서 돌아와 신발을 풀다
문득
신끈에 매달린 풀씨와 시선이 부딪쳤다
풀씨 왈—
왜 인사도 안 하고 가는 거야?
사람의 냄새
사람의 몸에서 사람의 냄새가 안 나고
여자의 몸에서 여자의 냄새가 안 난다
쪽쭉빵빵 플라스틱 마네킹의 에어컨 냄새
시동 거는 엔진 혹은 꺼진 엔진의 냄새
체온이 아닌 금속의 火氣
식고 달고 또 달고 또 식고
아비규환의 사거리에서
경비원이 조으는 주차장에서
과로사보다 차가운
욕망이 타고 남은 무감각의 냄새
정교하게 짜여진 정원
한 모퉁이에
기와 조각 하나 내쳐져 있고
풀의 냄새보다 살충제의 냄새가 짙고
당신은 늘 푸념이다
사람의 세상에
사람의 냄새가 안 난다고
높이 나는 잠자리
어느 파란 가을날
혼잡한 도시의 어느 조용한 모퉁이를
높이 나는 잠자리
허공에 찍은
보일 듯 말 듯한
방점 하나
이 늦가을
오는 밤엔 첫서리가 내릴지도 모를 이 늦가을
지구 밖을 날며
멀리
꿈같은 땅을 바라보는
우주인 잠자리
내일 아침엔 어느 풀밭에 쓰러져
영원히 잠들어 있을
그러나 지금은 높이 나는
빨간 잠자리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소게(小 憩)
바람이 분다
나그네 벗은 잔등에 바람이 분다
비가 내린다
나그네 땀 흘린 잔등에 가랑비가 내린다
팔백 리를 쪽지게 지고 온 잔등
지금은 잠시 짐 부린 잔등을
강바람이 터치를 한다
가랑비가 키스를 한다
바람 같은 아낙의 손길이 그리운 나그네
가랑비 같은 아낙의 잔소리가 그리운 나그네
먼 길 온 나그네
아직 갈 길이 더 먼 나그네
나그네 벗은 잔등에
지금은 바람이 분다
가랑비가 내린다
처 마
이 세상 어디에 처마만큼 아늑한 하늘이 있으랴
간혹 당신의 머리카락이 흩어지듯
풍경 소리 바람에 날리는
날 듯 날지 않고
떠날 듯 떠나지 않는
처마
창 아래 누우면
누구의 고운 눈섶같은
이세상 어디에 처마 위의 숲과 숲 아래의 처마만큼 좋은 세상이 있으랴
교회당보다는
산과 숲과 좀 가까운 곳에
사찰보다는
인정 치정과 좀 가까운 곳에
처마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날 훔쳐보고 있을
누구의 고운 이마같다
아 침
어제와 그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니 오늘 아침은 하늘이 흠칫 높아졌다. 屋舍와 수풀들의 이목구비가 한결 훤해졌다.
오랜만에 밤비에 숙면를 취하고 일어난 수림을 햇살이 찾아와 환하게 웃고 있다. 마주 보면 자꾸 좋은 오랜만에 합방한 젊은 부부같다
오늘 아침도 나는 땀을 흘렸다. 오늘 아침도 나는 아침에 흘리는 땀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침은 늘 새파랗게 젊다. 늘 싱싱하고 풋풋한 처녀총각 같다. 줄곧 천년을 보아왔지만 눈가에 주름살 한 오리 없다.
이 아침만은 누가 뭘 준대도 나는 바꿀 수가 없다. 헛기침 하나조차 팔고 싶지가 않다. 단 누군가와는 함께하고 싶다. 나누고 싶다
비가 오네요
비가 오네요
바람이 부네요
창은 줄곧 울고 있네요
거침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네요
조금 멀리서
나무들이 온 몸을 흔들어
창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하네요
한바탕 울고 나면 직성이 풀리는 애들처럼
한번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한결 후련하고 키도 한 뼘 자라는 사춘기 여자애들처럼
하늘도 간혹은 울어야 한다고 합니다
누구라고 설움이 없겠습니까
하늘에게는 우러를 하늘이 없는 것이 너무 슬프다고 합니다
하늘은 아버지가 없다고 하네요
너무 거룩해서 엄마도 없다고 하네요
바람이 세게 부네요
비가 많이 오네요
하늘이 줄기차게 사흘을 거푸 울고 있네요
오늘은 슬픈 하늘을 위해
우리가 하늘의 작은 위안이 되어줍시다
밤에는 작은 촛불을 밝혀
하늘의 작은 별이 되어줍시다
가난해도 사랑을 많이 했던 시절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과 미소가 태양처럼 떠오르던 아침
부르지도 않은 이름이
가만히 누워있는 가슴을 울리고
스스로도 신기해서
아무아무개야 하고 혼자 속으로 불러보면
정말로 가슴이 미어지게 미어지게 행복하던 아침
오래오래 벤치에 앉아
이슬에 어께를 적시던 밤들
별들이 너무 크고 너무 촘촘하고 너무 빛나던 밤들
기차의 긴 기적소리와 기선의 젖은 고동소리가 모두 사-랑-해- 로 들리던 아침과 저녁들
사랑했던 시절
사랑을 신앙했던 시절
한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추운 겨울 거리를
차 한 잔 없이 종일 걷던 시절
매일 연애편지를 쓰고 받고 기다리는 것이 일과이고
입술보다는 사진과 편지봉투에 키스를 많이 했던 시절
사랑이 있으면 집이 없어도 침대가 없어도 같이 살 수 있다고 정말 믿었던 시절
가난해도 사랑을 많이 했던 시절
노란 댕기
댕기야
풋소년의 창문을
앉을 듯 날 듯
나부끼던
노란 댕기야
노랑 나비야
행여 다칠가
손끝으로 다쳐볼 엄두도 못 내고
쪽지 하나 구겨 쥐고
우왕좌왕 헤매던 눈두렁과 들길들
아 이제 어느 길로 어디까지 가야 너를 만날 수 있으랴
봄이 오면
마른 땅에 누워
사과나무 꽃 너 때문에 비오듯 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동안은
무수한 매미며 잠자리로 번식해
때때로 나의 빈 하늘과 빈 들녘을 채우고
지어 성에 낀 겨울의 유리창에 조차 현신(現身)하던
댕기야
나비야
넌 지금 어디서 색바랜 헝겊이 되어
날 그리워하고나 있는지
행여 그러하다면
연지 곤지는 말고
순금 백금 비취 다이아몬드는 말고
가녀린 목 위에 귀여운 보조게만 오목히 하고
날듯 말듯 노랑나비 머리에 얹고
5학년 3반 교실 제일 앞 줄에
참으로 얌전하게
얌전하게 앉아있어주렴
혁일씨에게
혁일씨
작은 소망 하나가 가장 행복한 줄
당신은 이제 아시죠?
하늘의 표정인 당신의 표정
들의 마음인 당신의 마음
봄이면 풀처럼 발정하고
여름이면 그늘처럼 여유로롭기도 한 당신
이제 가을이 되면 단풍처럼 붉게 타고
겨울이 되면 눈처럼 한없이 차고 부드럽고 하-얄 당신
아무리 시인을 거지로 만드는 시대라고 해도
아무리 부자도 거지인 세상이라고 해도
혁일씨
당신만은 부자가 되어 주십시오
마음이 넉넉한 마음의 부자가 되어 주십시오
촌주 한 잔에 카 - 좋고
시 한 줄로 아침 반 나절 행복하세요
나무와 유별나게 친하고
풀 한 포기와도 할 말이 많은 당신
혁일씨
당신은 소중합니다
잠자리 하나 만큼 이삭 하나 만큼 소중합니다
그러니까 더도 말고 당신은
잠자리만큼만 가벼우십시오
이삭만큼만 포만하십시오
하늘은 나에게 아무런 행운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미천한 것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라고 하시던
혁일씨
작은 소망 하나 갖고
부디 거룩하십시오
부디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