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15

해옥이

부끄럼이 서 말이던 소녀
해옥이

다 큰 계집애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개 들어 날 바라보네

잡을 듯이
놓칠 듯이

바라보네
물 같이 바라보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대의 손은 한 번도 부드럽지가 않네

조금 스쳐도 감전한 듯 놀라던
한 번도 쥐어보지 못한 소녀의 손

지금은 내 손을 너무 꼭 쥐어서
아프네 아프네

너와 나의
가슴이 아프네


S에게     

너와 함께여서
나는 감히 천할 수도 있다

너와 함께여서
나는 감히 가난할 수도 있다

너와 함께여서
나는 미천하고 가난해도 감히 귀하고 풍요로울 수가 있다

다 너 때문이다

물은 흘러 아름답고
산은 그저 서 있는 것으로 멋있고
나는 너를 멀리 바라는 것만으로 때로는 뿌듯하구나

한 번도
너를 가져서 먹어서 내가 배부른 적은 없다
나는 배고픈 것이 때론 너와 나를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꽃이 더 뭐겠냐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그저 바라봄이 아름다울 뿐이다

내가 더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나의 넋과 육신도 오로지 피고 질 뿐이다
너와 더불어
바람과 더불어


인어공주

야색은 요염한데
적막한데
이제는 생선이라 불리는 인어공주
눈은 어디 두고
마음은 어디다 버리고
왕자와는 어떻게 헤어져
지금은 시장 바닥을 서성이는
이제는 생선이라 불리는
인어공주
이팔청춘 인어공주
휘청이는 너의 발걸음
아직은 발이 엄청 아픈가보구나
하이힐이 아슬아슬 위태롭구나
바닷속 수정궁에서 온 인어공주
그러나 지금은 생선이라 불리는 인어공주
이제 누구를 안아 체온이 있을까
이제 누가 안아 사랑이 있을까
이 밤
하늘엔 별이 없구나
너의 허연 얼굴
허연 허벅지
허연 청춘을
가끔은 희끄무레한 여명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이 밤 이 도시에 무슨 태양이 필요할까
거리엔 천자만홍
요상한 불빛들이 현란한데
한없이 적막한데


연소

너와 끊은지 이제 몇 해째지
가족들에게 좋고
나 자신의 건강에도 좋다는데
다들 그러는데

다들 해롭다고 하는데
그래도 늘 그리워서
상상으로라도
끼워보고
물어보는

그래
그건 너가 더 잘 알겠지
널 그리워하는 건 나의 이빨이 아니다
나의 입술이다
나의 영혼이다

이빨의 세상에 살며
나는 입술을 너무 오래 쓰지 않았구나
키스하고
애무하고
타고
태우고

아무래도 나는
이빨보다는 입술을 많이 쓰는 동물이어서
아무래도 난 너가 최고의 애인인 것 같다

하등에 쓸모가 없다는
몸에만 해롭다는
아, 연소


세상 어디를 가도 오전 한때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오전 한때 느닷없이 조우하는 학교 운동장의 스피커
와- 와- 교실마다 쓸어나오는 여드름 얼굴들, 꽃봉우리 가슴들
그러면 창호지 울던 창문 투닥투닥 터지듯 열리고
순이의 여린 손끝 어찌어찌하여 내 청춘의 여드름 건드려 나그네 주책없이 가슴 짜릿하고

이 세상 어디를 가도 가다가 오전 한때 가슴에서 터지는 저 학교운동장의 스피커
교장선생님 길고 딱딱한 훈시 뭐라 뭐라 바람에 잘도 날리는데
눈빛이 물같은 남학생 여학생들 사이에 끼어 대책없이 녹아내리는 눈사람
폐기한 종루 구리종 하나 간만에 제 귀고막 얼얼하게 울리나니, 우나니

17살에 떠난 그 시골학교 졸업식은 아직 끝나지 아니하여 나그네 감히 더 늙지도 못하고
오늘도 오전 한 때 느닷없이 여우비 조우하고 가던 길 못가고 멍청히 사거리에 섰는데
아, 파란 등 붉은 등 명멸하고 경찰아저씨 선글라스 뭐라고 소리치고
앞뒤 좌우 앙칼진 경적소리 독촉이 성화같은데


맨발로 오는 사람아

맨발로 오는 사람아
너의 흰 발목을 생각하면
내 발목이 시구나
짚신 한 켤레도 마음 편히 신을 수가 없구나

발바닥이 앳돼서
작은 모래알에도 오금을 못 쓰는
그래도 그 험한 길을 맨발로
기어코 올 거냐

맨발로 오는 사람아
어둠 속 너의 맨발
이른 봄 하얀 배꽃 같구나

너의 맨발 핏줄이 푸르러서
내 마음이 아프구나

맨발로 오는 사람아
내 발등을 밟아라
내 가슴을 밟아라
내가 너의 땅이 되어 주리니

이제부턴 맘 놓고 걸어라
춤도 추어라
발이 아프다고 엄살도 부리고
업어달라고 떼도 써라

맨발로 오는 사람아
꽃잎보다 여린 사람아
맨발이 부르터 오늘은 桃花같은 사람아


초원의 노래    

초원의 노래는 맨귀로 들을 수가 없어서
듣는 사람은 팔을 벌린다
대자가 되어 대지에 드러눕는다

초원의 노래는 바로 서서 부르다
부르다 가로 넘어지지 않고는
사람이 온전할 수가 없어서

초원의 노래는 내가 부르다 내가 녹아
나는 물이 되고 풀이 되고

가락이 긴 초원의 노래는
한 곡을 채 부르지 못하고
나는 이미 아아한 구릉이 되어 있구나


낙엽

여든의 불편한 노구에도
엄마는 날마다 채소밭에 나가 오뉴월의 땡볕을 쬐셨다
가을이 되면 엄마는 더 바쁘셨다
한 해의 마지막 고추며 가지며 가지가지 나물들을
쪄서 썰어서 쑥대발에 널어 말리셨다
참으로 가볍게 떠나시려고
떠날 때 가벼운 낙엽 한 장으로 홀가분이 떠나시려고
그래서 엄마는 날마다 볕을 쬐셨을 것이다
엄마가 떠나신 날 나는 울지 않았다
통곡하지 않았다
낙엽 한 장 지듯
그렇게 가볍게 조용히 가신 엄마에게
요란스런 것은 예의도 아니고 효도도 아니리라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통 늦가을 볕의 냄새뿐이다
오늘도 산책길에 지는 낙엽 한 장 보며 엄마가 생각났고
나도 갈 때는 저렇게 갈 거라고
남은 인생은 좋은 바람 좋은 볕에 잘 말려서
낙엽처럼 가볍게 갈 거라고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마리의

가슴이 큰 마리
부딪칠 때마다
나는 저의 젖이 걱정인데
다치면 터질 것 같은
터지면 다칠 것 같은
저 젖을 어쩔건가
혼자 안고 있기엔 저의 허리가 너무 가냘픈데
늘어뜨린 두 팔이 쓸쓸한데
가슴이 큰 마리
외로움이 너무 실려 가슴이 버거운 마리
만나면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꽃이 지듯 후둑 후둑
눈만 떨어뜨리는 마리
기실 너보단 내가 훨씬 약해서
널 보면 난 아이가 되는데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누나 손에 끌려
고아원 탈출하는 머스마이고 싶은데
가슴이 큰 마리
오늘은 간덩이도 한번 커져서
바람같이 골목길 빠져나와
구름처럼 사거리를 지나
오늘은 규방으로 날 데려갈거나
비 맞고 감기에 걸려
머스마는 온몸이 불덩이 같은데
젊은 엄마 아기 품 듯
큰 가슴 남자 머리 따뜻이 안아
자장자장 자장가 불러
마리야, 오늘 밤은 너
기어이 머스마를 울리고 말 거지


조어해독(鳥語解讀)

작은 새 저만큼 길 막아 서며
-- 친구 할거죠? 할거죠?

대답 아니하고 꼿꼿이 걸으니
포르릉 나뭇가지 날아 올라
--  해요, 해요, 친구 해요.

못 들은 척 저만큼 지나치니
등뒤에서 쫑알대는 소리
-- 뭐가 그리 잘났나요. 쳇, 쳇

-- 좋아요, 우리 친구해요.
급기야 발 돌려 다가가니
작은 새 화들짝 저만큼 비켜서며 더듬는 말
--시, 실,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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