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일 시선 23

낮잠

한여름의 정오를
대자로 누워
낮잠을 잔다   
바람과 제비가 마음대로 드나들게
사립문 현관문 다 열어놓고
낮잠을 잔다   
멍멍이도 주인을 닮았는지
집을 지키지 않는다           
개가 안 지키는 마당엔
꽃들이 무성하다       
나에게
이제 더 잃어버릴 게 무엇이 있는가
바람아
재간 있으면 내 마음을 훔쳐가라       
핸드폰은 끄고
전화선은 빼고
낮잠을 잔다   
나에게
낮잠보다 더 큰 일이 무엇인가
이세상
낮잠 자고 일어나는 오후보다
더 찬란한 것이 무엇인가
초음속으로 아찔아찔하게 회전하는 세상 하나를
저만치 발치에 두고
한여름의 정오를
대자로 눕힌다
그렇게도 원통하던 인생이
이젠 더 원통하지도 않으려나 보다
그렇게도 야속하던 세상이
이젠 더 야속하지도 않으려나 보다
흘러가는 세월을 내가 어쩔 것인가
낮잠이나 자자

 

꿀벌과 나비가 찾지 않는
풀은

작은 비방울에도 휘청이는
풀은

혼자 그리워하고
혼자 설레이는
풀은

호소할 억울함보다
호소할 행복이 많은 것 같은
풀은


어느 봄날
원족 갔다 둑에서 본 풀은

끝내
뭐라고
나에게 말을 못하는 풀은

나와
풀은


 

나무는 아프지 않다
나무는 꽃이 아프다

나무는 아프지 않다
나무는 꽃이 아픈 것이 아프다

나무는 아프지 않다
나무는 많이 아프다


 

낙타

먼 길을 가는 낙타는
목이 길다
희망은 절망보다 길어야 하기 때문에
낙타는 목이 길다
밤에도 낙타의 목은
별들을 향한다
털도 모래의 색이고
등도 모래산의 능선이지만
그 순한 눈을 보면
맑은 샘이 보인다
갈증과 인고의 흔적은 없고
오로지 너그러움이 고여있다
낙타가 있는 한
사막엔 길이 있다
낙타가 있는 한
사막엔 샘물이 있다
무수한 마을과 城과 역사를 묻어버린 사막은
언젠가는
저 낙타도 묻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저 선한 눈
모든 고난을 초월한 저 눈빛은
묻히지 않으리라
오늘도
내일도
긴 목을 장검 처럼 뽑아들고
낙타의 먼길은
계속되리라

 

남자가 걷고 있다

한 남자가 걷고 있다
한 시대를 걷고 있다

남자 가라사대

남자는 좇지 않는다
남자는 쫓기지 않는다

남자는 날지 않는다
남자는 날리지 않는다

들을 지나는 구름의 투영처럼
혼잡한 거리를
남자는 소리없이 간다

한 남자가 걷고 있다
한 세상을 걷고 있다

 

좋은

좋은 옷 한 벌은 평생의 친구다

좋은 옷은
좀 구겨도
주름이 오래가지 않는다

좋은 옷은 성품이 너그럽다

좋은 옷은 다른 옷을 질투하지 않는다
아무 옷 하고나 잘 어울린다

좋은 옷은 옛친구같다

좋은 옷은
입을수록 편하고
헐고 퇘색할수록 멋이 난다

좋은 옷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사랑처럼 쉽게 식지도 않는다

좋은 옷 한 벌은
죽을 때까지 같이 간다

  

정자(亭子)

마음이 훤한 정자는
유독 바람을 좋아했다
지나는 바람
잠간 들르는 바람
주말이면 꼭 와서 같이 자는 바람
모든 바람과 바람기가 있는 남자와 여자를
정자는 좋아했다

가슴이 트인 정자는
시야가 넓었다
산기슭 껴안고 도는
강 하나
그리고 강 건너
평야 하나 쯤은
넉넉히 품을 수가 있었다

정자는
벽이 없다
고로 문이나 창이 따로 필요없다
정자에겐
꿋꿋한 기둥들과
높은 삿갓 하나가 필요할 뿐이다


설이  임박한  어느날  아침의  산책

오늘도 신기한 하루다
오늘도 아침이 되니 눈이 뜨여졌고
밝은 세상 하나가 보였다

설이다
쥐하고 돼지가 무엇엔가 날인하고 인계하는 날이라던데
나에겐
또 출장 한 번 하는 일이겠다

올해는 내 발에 맞는 새 신 한켤레 사 신고
좀 더 거뜬하게 걸어보자
너무 과욕을 부려
너무 큰 신발을 신는 일은 없도록 하자
너무 옹졸하여
너무 작은 신발을 신고 고생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새해는
따뜻한 사람과 따뜻한 이야기 많이 나누자
은근히 수작이 많은 나무가 되자
꽃에는 마음 팡팡 주고
바람에는 머리칼 날려보자

새해에도 나는
여자를 바라볼 수 있는 남자여서 행복할 것이다
사랑 같은 것에 아직 면역이 안 돼
고뿔 같은 데 한 두 번 걸리는 일
그런 일은 건강에도 좋다더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각의 모든 것에 감사하자
지금 이 시각 하고 있는 짓을
서너 번은 더 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하자

지금 나는
새로운 아침 하나를 걷고 있다
텅 빈 길에 흩어지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에 희열한다
길 옆 잎새들의 서걱거리는 소리에 희열한다

신기하다 오늘도
산다는 것이
살아서 이것 저것 보고 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새삼스럽게 신기하다

 

空 園

공원(公園)은 空園이 좋다

사람도 가고 새도 가고 바람도 가고
잔잔한 비만 가득한
空園이 나는 좋다

빈 자리가
오히려 더욱 충만하다

空園은
마음을 비운
스님같은 나의 친구

아무 말 없으셔 너무 좋다
길 하나를 비워 날 맞아주셔
정말 고맙다

 

소싯적 원족 가던

들꽃 꺽고 노래 부르며
소년이 원족 가던 뒷강

가면 강도 흥얼거리며
어디론가 원족 가고 있었고

강과 소년은 종일 놀다
황혼무렵에야 헤어지군 했지

아득히 세월이 흐른 뒤
환향한 소년이 다시 찾아가며는

강도 한 번 쯤은 돌아와
그 때 놀던 모래톱을 서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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